▲ 가을이 성큼 다가왔는지 길에는 벌써 코스모스가 하늘거리고 있다.

고추밭가로 쪽을 심은 게 풀밭인지 쪽 밭인지 구별이 안 간다. 토종씨앗에 관심이 많은 언니로부터 이른 봄에 쪽 씨를 받아놓고는 농사일로 바빠서 하루하루 늦어지고 뒤늦게 포터에 모종을 해놨더니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텃밭의 한 귀퉁이에 심어놓았다. 풀이라 그런지 참 잘도 자란다. 이제는 꽃이 피기 전에 베어서 발효시켜야한다. 쪽빛스카프를 만들어 좋은사람들에게 선물할 생각에 매일아침 눈인사를 나눈다. 동대문시장에서 명주 한필을 끊어다놓고는 여적 옷 한 벌 해 입지 못하고 있다. 뭐 그리 바쁜지 치자염색 홍화염색 소목으로 물 들여놓은 고운명주들 다 잠자고 있다. 찬바람나면 모다 꺼내 누벼서 따뜻한 조끼하나 만들어 입어야겠다.

내손을 기다리는 건 쪽 뿐 아니라 대추나무도 죽겠다고 난리다. 고추밭가로 심은 호박은 자기 영역을 넘어 인정사정없이 대추나무를 타고 기어오르고 있다. 제법 굵어진 대추 알 만으로도 버거울 텐데 이웃사촌이 좋다고 기어오르니 참 난감한일. 벌써 블루베리까지 덮칠 기세다. 아직 너무 어리고 올해 첫 수확으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블루베리를 건드리면 나도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다. 너무 기세등등한 놈들은 모두 따서 호박잎쌈으로 먹어버릴 테다. 충청도 음식 중에 호박잎국은 요즘이 딱 제철음식이다. 특별히 식단을 짜지 않아도 계절에 나오는 것을 최대한 활용했던 어르신들의 지혜다. 요즘 호박잎은 천지에 널려있고 항아리 가득 된장이 익어갈 테니 된장 한 숟가락 풀고 멸치 좀 넣어 국물을 우려낸다. 국물이 보글보글 끓을 때 호박잎 썩썩 비벼서 풀기를 빼고 넣어 끓이다가 고춧가루나 매운 고추 하나 썰어 넣고 한 소금 더 끓이면 일품이다. 가을 아욱국은 문 닫고 먹는다는데 우리 집은 호박잎국을 더 좋아해 문 꼭 닫고 먹는다. 하하하.

며칠 전 청천에 귀농하신 형님이 올해 첫 열매를 맺은 사과가 14개 열렸는데 그중에 6개를 새가 쪼아 먹고 있다고 이걸 어째야하나 해서 그냥 올해는 새하고 어우리 짓는다 생각하시라고 위로해드렸더니 웃으신다. 동물과 곤충들과 어우리 짓는 농산물이 한둘이더냐? 브로콜리는 망을 둘러쳐놔도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은 고라니가 몇 차례 해치웠고 약하고 어린놈들은 귀뚜라미가 야금야금 먹고 있다. 콩은 새가 쪼아 먹고 배추 잎은 톡톡이와 귀뚜라미가 먹어치운다. 먹고 나면 때우고 또 먹으면 또 때우고 주인하고 벌레하고 숨바꼭질 하듯 한다. 무더위에 씨를 파종하고 모종을 길러내기도 힘든데 그것마저 약탈하려는 곤충들과 짐승들 때문에 가을농사 참 어렵다.

기후변화로 봄 가뭄은 길어지고 초여름 장마는 오다말고 늦장마가 오래간다. 비타령이 벌써 한 달도 넘었다. 고추는 병이 와서 꺾어놓은 밭도 있고 벌레는 유난히 극성이다. 어릴 적 고향에서는 고추를 따야 육성회비를 낼 수 있었는데 그 까마득한 가난을 이겨내고 잘도 살아 왔다. 고추가 널려진 마당의 그림을 볼 때마다 아득한 고향으로 추억여행을 떠난다. 그래도 가을은 온다. 수수밭 옆으로 코스모스가 하늘거린다. 책가방 메고 코스모스 신작로길 같이 걸었던 동무들은 지금쯤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나 나처럼 농사짓는 친구들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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