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농 협동화로 대경영 실현이 농업 살 길”

한국의 대표적 농업경제학자로서 ‘소농의 협동화를 통한 대경영의 실현’을 한국 농업이 가야 할 제3의 길로 제시하고 평생의 화두로 삼아온 김병태 건국대 명예교수. 어떤 경우에도 소신을 꺾지 않고 한국사회 민주화와 농민운동의 한 가운데서 고집스럽게 시대의 격랑을 헤쳐 온 실천지성이다. 한국농어민신문 창간 34주년을 맞아, 창간 주역의 한 명인 김 교수를 경기도 하남시 자택에서 만났다. 김 교수는 1980년 4월 한국농어민신문의 시초인 전국농업기술자협회 부설 농산물유통연구소 설립 때부터 1993년 8월까지 한국농축수산유통연구원 부원장으로 한국농어민신문과 함께 했다.
 

▲ 민주화와 농업문제 해결, 겨레의 통일을 화두로 삼아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김병태 교수. 한국농업의 회생, 통일농업이 담론으로 등장한 현 시점에서 ‘소농의 협동화를 통한 대경영의 실현’이라는 그의 지론이 주는 의미는 가볍지 않다.

주석균 선생과의 만남, 한국농업문제연구회

팔순의 나이로 보기 어려울 만큼 강건하고 자세나 말씨 모두 꼿꼿하다. 세월이 흘러도 중심이 변하지 않아서일까.

“운중(耘中)이란 아호의 뜻이 궁금하다”고 묻자 “한국농업문제연구회 시절 모시고 있던 정병학 숙명여대 교수(역사학)가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김맬 운자와 가운데 중자 ‘운중’은 중용이란 뜻이기도 하고, 극단을 피해 본질을 가리고 핵심을 추구하라는 뜻이기도 하지.”

농림부 차관, 한국토지개량조합연합회 회장을 지낸 남정 주석균 선생이 설립한 한국농업문제연구회는 50년대와 60년대 한국경제와 농업문제 연구의 산실이었다. 김 교수는 “당시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머슴에 관한 연구’ 석사논문을 쓸 무렵, 주석균 선생이 학장이던 최호진 교수를 찾아와 ‘인재를 천거해 달라’ 해서 최 교수님이 ‘딱 맞는 사람이 있다’고 나를 소개해줬다”고 회고한다. 이렇게 주석균 선생을 만난 그는 1956년 12월부터 농업문제연구회에서 연구위원, 간사장으로 일하게 됐다.

농업문제연구회는 한국경제학계의 대외의존적 성장이론에 맞서 자립적인 경제와 농업발전의 담론을 이끌었다. 주석균 회장을 비롯해 박근창, 정병학, 조동필, 이창열, 최주철 선생이 이사진으로 있었고, 김병태, 유인호, 진흥복, 김낙중, 박현채 선생이 연구위원으로 참여했다.


억압 속에서 지켜 간 시대정신

농업문제연구회 시절 그는 5.16 쿠데타를 맞아 질곡의 시대와 맞서기 시작한다. 당시 민족일보에 글이 실렸던 그는 쿠데타 세력이 고 조용수 사장에게 북한에 동조했다는 죄를 뒤집어 씌운 ‘민족일보 사건’으로 쫓겨 다녔다. 민족일보는 1961년 2월 창간돼 4·19 혁명 직후 분출되던 통일지향, 근로대중 대변 등 진보 논조로 가판 1위를 기록하는 등 호평받았다. 그러나 그로 인해 민족일보는 쿠데타 세력의 표적이 되어 조용수 사장이 사형당하고 말았다. “1961년 5월31일 처가인 전주의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청첩장을 돌렸는데, 5.16이 일어나는 바람에 결혼식도 못하고 석 달을 도피해 다니다가 영등포경찰서에 자진 출두했어. 당시 조용수 사장이 내게 논설위원으로 참여하라 해서, 나는 아직 어리고 경륜이 부족하다며 고사하고, 기존에 써 놓은 글을 몇 개 싣도록 했는데, ‘미국의 대한원조의 정체’ 같은 글을 문제 삼은 거야. 만일 내가 논설위원을 했다면 그 때 어찌 됐을지 몰라.” 김 교수는 집으로 돌아왔지만, 중앙대 교수직에서 해직되고 말았다. 민족일보 사건은 그러나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조용수 사장에 대한 사형판결을 위법으로 규정, 재심을 권고했고, 억울하게 사형된 조용수 사장은 2008년 서울 중앙지법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김 교수는 1964년 6.3 사태로 불리는 한일회담 반대 운동 국면에서 또 다시 군사정권에 의해 잡혀간다. 주한 외국군 철수, 남북한 서신교환, 문화·경제교류를 통한 평화통일을 목표로 ‘인민혁명당’을 결성한 혐의로 박현채, 양춘우, 도예종, 정도영, 김금수 등과 검거된 것이다. 이를 ‘제1차 인혁당 사건’이라고 하는데, 1965년 1심에서는 무죄였지만, 2심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됐고, 대법원에서 원심이 확정됐다. 1차 인혁당사건은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북한과 연계된 인혁당이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조작함으써 국민적 분노로 인한 군사정권의 정치적 위기에서 빠져나오려 만들어낸 사건이었다.

이후 유신반대 운동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1974년 ‘2차 인혁당 사건’으로 불리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등 8명이 1975년 사형을 선고 받은 지 18시간만에 사형을 집행당하는 초유의 ‘사법살인’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유신체제에 대한 거센 저항에 직면한 군사정권이 학생 시위의 배후에 실체도 없는 인혁당이 있는 것처럼 꾸민 것이었다. 결국 1, 2차 인혁당 사건은 모두 진실 규명과정을 거쳐 2007년 서울중앙지법에서 무죄, 2013년 11월28일 서울 고법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김 교수는 유신 말기인 1979년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으로 연행되기도 했다. 당시 이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이는 원장이던 강원룡 목사를 비롯해 간사이던 한명숙 전 총리, 이우재 전 의원, 장상환 경상대 교수와 많은 농민들이 있었다.


나는 어른들의 덕으로 살았다

중앙대에서 쫓겨난 김 교수는 중앙농민학교 전임대우교수로 있다가 1968년 상허 유석창 선생에 의해 건국대 교수로 임용됐다. 젊은 교수 시절 굴곡이 많은 인생길을 지나온 그는 “나는 어른들의 덕으로 살았다”고 고비 때 마다 이끌어준 은사들과의 인연을 술회한다. 그 어른들이란 중앙대 은사인 박근창 선생, 최호진 선생, 농업문제연구회로 이끈 주석균 선생, 건국대 교수로 임용한 상허 유석창 선생 등을 일컫는다.

김 교수를 잘 아는 사람들 중에는 그를 애칭으로 ‘의리의 돌쇠’라고 비유하곤 한다. 이는 지난 1967년 유럽에서 활동하던 지식인과 유학생들이 간첩단으로 몰렸던 공안사건인 동백림사건(나중 조작으로 판명)에 주석균 선생이 연루됐을 때도 김 교수가 끝까지 농업문제연구회를 지켰던 일에서 비롯된다. 연구와 표현의 자유마저 억압되던 엄혹한 시대에 반독재 민주화와 농민운동, 통일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그에게는 ‘탄탄한 학문’, ‘소신과 의리’라는 덕목이 있었다.

김 교수는 1977년 매일경제신문의 ‘이코노미스트상’, 1991년 한국경제신문의 ‘다산경제학상’을 수상할 정도로 한국의 경제학계가 인정하는 농업경제학자다. 그가 한국농업의 발전이론으로 제시한 ‘한국농업경제론’은 1985년 신동아가 꼽은 한국의 명저 100권(1945~1984)에 근대한국경제사연구(최호진), 한국경제의 자본축적과정(홍성유), 한국자본주의사연구(김준보), 한국자본주의성립사론(조기준), 민족경제론(박현채), 한국노동운동사(김윤환), 분배의경제학(변형윤) 등과 함께 경제학편의 명저로 선정됐다.

한편 김 교수는 현재 대한민국의 바른 역사, 자주독립, 조국통일, 인권수호를 위해 활동하는 원로들의 모임인 새날희망연대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한국농업 제3의 길

그의 농업경제론은 한국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파악하고, 농업문제를 한국경제와의 관련 속에서 분석한다. 즉 “오늘 한국의 농업문제는 한국경제 모순이 농업부문에서 발현된 형태”이므로 “농업문제의 해결은 전체 경제의 모순 해결을 통해서 성취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경제를 고친다고 농업문제 해결 노력을 게을리 하란 것은 아니다.

김 교수는 우리 농업의 기본구조를 ‘고도화된 의존형 국가자본주의하의 소농경제’로 규정하고, ‘소농의 협동화를 통한 대경영의 실현’을 한국농업이 살아남기 위한 제3의 이론으로 제시한다. 한국의 농지개혁이 불철저하고 그 후속조치가 잘못돼 소농경제의 자유로운 개화가 봉쇄되고, 농지개혁으로 형성된 자작농이 괴멸돼 소작농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소농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소농의 협동화로 소경영체제를 탈피하고, 대경영의 유리성을 추구하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아래서 소농의 운명은 두 가지 이론으로 나뉜다. 하나는 자본제화의 진전에 따라 농업에서도 공업과 같이 대경영이 소경영을 구축하고, 끝내 소농경영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농업은 공업과 달리 자연적 지배를 많이 받는 산업이고 농업생산과정에 인간이 실체적으로 편입돼 있어 농업생산의 속도는 변경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대경영이 소경영보다 우월할 수 없는 만큼 소경영은 영구히 존속한다는 이론이다. 현재까지의 농정은 소수의 부자농민 육성이나 기업자본 유치를 통해 규모화하고 경쟁력을 높이려는 점에서 전자의 이론을 추수하고 있다. 김 교수는 “농업을 경시하는 농정, 다국적기업에 의한 농산물의 수입자유화가 일반화되면서 이대로 한국의 소농경제가 파멸해가는 것을 방관하거나 소농 우월론을 믿고 낙관할 수 없다”며 “소농이 자기 소유의 토지를 출자, 여럿이 어울려 경영을 대형화하고 기계화를 추진해 가야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하면 소작문제가 해소되고 모여진 힘으로 생산기반을 닦고 과학화가 진전되며, 유통비 절감, 시장교섭력 강화, 신용력 증대 등의 효과가 발휘된다”는 것이다.


농협개혁, 통일이 희망 

김 교수는 만시지탄을 얘기했다. “너무 늦었어. 소농 협동화로 발전할 기회가 있었지만, 정부가 그 방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어. 농정의 방향을 바꾸고, 농협을 농민의 것으로 만들어, 개혁된 농협이 소농 협동화에 의한 대경영으로 갔어야 해.” 김 교수는 일찍이 농협개혁과 관련, 중앙회는 운동체 기능을 하고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은 각각 연합회 방식으로 분리하는 연합회 방식을 주장해왔다. “현 지주회사 체제는 협동조합 7대원칙과도 배치되고, 인적결합이 아니라 자본에 의한 지배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농민조합원의 피해만 부른다”는 것이다. 농협을 농민의 협동조합으로 개혁해야만 농업 발전의 길도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 한국의 명저 100권에 꼽힌 김병태 교수의 농업경제론과 또 다른 역작인 토지경제론.

김 교수는 지금까지 농업문제 해결의 기회를 놓친 만큼 이제는 통일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제부터라도 정신을 차려 통일대비 농업으로 재구축 해야 해. 북의 지하자원은 내려오고, 우리 농산물은 올라갈 수 있어. 진실된 농업교류를 통해 남한의 과잉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낙후된 북한농업도 살릴 수 있어. 인력문제도 협업을 통한 대경영과 기계화로 해결방안을 찾으면 돼.”

역대 정권에 걸친 무차별 개방과 농정실패로 농업이 무너져 가는 상황에서 새로운 농정의 좌표가 필요한 지금, 한국농업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을 명확히 제시한 김 교수의 한국농업경제론이 주는 시사점은 크다. 최근 통일 논의가 활발한 상황에서 통일을 농업문제 해결의 마지막 기회라고 말하는 노 석학의 목소리가 강한 공명을 주고 있다.

|대담·글=이상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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