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레 책에 대해 대화하기 좋아

Q. 아이들이 소리 내 책을 읽을 때 주위에서나 형제들이 시끄러워 자신의 책을 읽지 못한다는 얘기들을 한다. 소리 내어 책을 읽는 것은 아이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A.책을 소리 내어 읽는 아이들을 가만히 지켜보면 그 책에 푹 빠져 자기도 모르게 소리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 글자씩 가리키며 읽는데 땀까지 뻘뻘 흘리는 아이도 있다. 그만큼 아이는 책읽기에 몰입 중이다. 그런데 그 때 “소리 내지 말고 읽어라”며 아이의 책읽기를 종종 뚝 끊는다.

물론 공공장소에서 크게 소리 내서 읽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될 때가 있다. 하지만 공공예절로 굳이 조용히 해야 하는 곳이나 때가 아니라면, 또 일부러 큰 소리로 읽는 것이 아니라면 아이들은 오히려 소리 내어 읽는 것이 훨씬 읽기가 수월하다.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눈으로 읽는 묵독이 같은 속도로 아이들 머리 속에 들어오려면 적어도 10살은 넘어야 한다. 고학년은 돼야 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긴 문장은 자연스럽게 띄어쓰기까지 다 파악이 되기보다는 한 글자, 한 글자 떨어져서 읽혀진다. 그러니 눈으로만 읽어서는 글자는 알겠는데 그 의미가 이해되지는 않는 것이다. 아마도 아이를 가르쳐본 사람이라면 아이들이 문제 뜻을 몰라서 못 풀다가 소리 내서 자연스럽게 읽어주기만 해도 알겠다고 하는 경우를 누구나 겪었을 것이다.

어른들이야 이미 그 단계가 지나 소리 내는 것보다 눈으로 금방 읽고 이해하는 게 너무도 당연하고 훨씬 수월하지만 아이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글자를 겨우 뗀 아이들은 문장이 소리가 돼 내 머리 속에서 뛰어 놀려면 한참을 더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교실에서도 시끄럽다, 도서관에서도 시끄럽다, 조용히 마음속으로 읽으라며 아이들의 입을 닫아 버린다. 심지어 집에서도 시끄럽다고 소리 내지 말고 읽으라 한다. 하지만 3·4학년이 돼도 소리 내어 읽도록 해 줘야 한다.

그것을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책 읽어주기’이다. 즉 소리 내 읽는 것은 저학년에게만 허용해 주라는 것이 아니라 어른도 마찬가지다. 말소리로 바뀌어 들리는 이야기는 눈으로만 읽는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소리 내어 읽지 말라는 것은 또 한편으로는 ‘혼자 읽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어느새 책 읽기가 ‘혼자’, ‘자리에 앉아’, ‘가만히’하는 활동이 돼 버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책읽기가 이렇게 바뀐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책의 가치와 책의 내용이 지금과는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소크라테스, 플라톤 시대에도 모두 소리 내어 책을 읽었고 책으로 쌓은 그들의 지식과 사유는 대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동양 역시 한자에 담긴 깊은 뜻을 토론으로 공유했으며 문학의 희로애락은 책 읽어주는 사람 ‘전기수’의 입으로 백성들에게 퍼졌다.

시대가 바뀌어 책이 흔해졌고 그 책의 종류도 셀 수 없이 다양해져 책읽기의 흐름도 바뀌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글자를 이제 막 깨쳐 알고 있는 낱말도 몇 안 되는 아이들은 소리 내서 읽어야, 또는 누군가 소리 내어서 읽어줘야 귀에 들어오고 머리에 그릴 수 있다. 그래야 책 읽는 재미가 더 커질 수 있다. 침묵의 독서만 강요해서는 오히려 위험할지도 모른다.

혼자 읽고 혼자만의 상상 세계에 빠져 자신만의 해석으로 판단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재미있어서 세상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 ‘다독아’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혼자서 책 속에 빠져 있으면 아무도 간섭하지 않고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갈등상황은 아예 만들지 않아도 되는데다가 마음먹기에 따라 주인공도 될 수 있고 악인도 될 수 있으니 차라리 그 세상을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게임 자체 보다 게임 중독으로 혼자만의 세상을 만들어버리는 것이 위험하다면 책읽기도 어쩌면 마찬가지일 수 있다.

소리 내어 읽자. 그리고 소리 내어 읽어주자. 그렇게 같이 읽은 책으로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자. 어쩌면 그렇게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내 입으로 다시 책이 나오는 그 때 나의 책읽기가 완성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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