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큰 걸음으로 성큼 다가왔다. 등산객들은 수확이 끝난 과수원의 쓸쓸함에 끌려 이곳으로 온다고 한다.

그러나 농사꾼의 마음으로 보면 여기는 지금 전운이 감돈다. 결전을 앞두고 도열한 병사들처럼 찬바람 속의 과실나무들이 의연한 표정으로 서 있기 때문이다.

지난겨울, 우리를 덮친 추위는 마치 처음 경험하는 것처럼 낯설고 날카로웠다. 겨울이 채 가시기도 전, 나는 봄을 기다리지 못하고 서둘러 밭으로 나왔다. 추위에 떨고 있을 나무들이 안타까워 일찍 나온 것이다. 다행이랄까. 내 포도나무들은 무사했지만 참으로 많은 과실나무가 얼어 죽었다.

봄에 전국적으로 과실나무 묘목이 품귀현상을 빚은 것은 그만큼 심어야 할 자리가 많다는 뜻이었다. 살아남은 나무는 어버이의 마음으로 돌보고, 죽은 자리에는 그렇게 다시 희망을 심는 것, 그것이 농사꾼의 마음이다.

나는 죽음의 강을 무사히 건너온 것이 대견해 나무를 어루만지고는 했다. 가지치기를 시작으로 바빠진 일손은 오뉴월에 절정을 이루었다. 열매솎기, 봉지 싸기, 순 따 주기 등.

그런데 여름 내내 지루하게 내린 비 때문에 농사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포도뿐만이 아니다. 복숭아, 사과, 배, 심지어 비닐하우스 안에서 수확하는 토마토와 텃밭의 채소들까지…. 햇빛 구경을 못한 작물들이 광합성 작용을 잘 못해 품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농부들은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잘난 자식도 내 새끼요, 못난 자식도 소중한 내 새끼가 아니던가. 올 농사가 좀 아쉬웠으니 내년 농사는 잘 지어보리라며 앞날을 기약했다. 그러나 세상인심은 달랐다.

“이상 기후 때문에 작황이 나빠 질은 낮은 데도 농산물값이 너무 비싸다.”

텔레비전에서는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연방 호들갑을 떨었다. 전에 없이 수확량이 적으니 다소 비싼 것이 당연하거늘, 물가 불안의 주범으로 농산물을 거론하고 있었다. 그것은 고단한 농심에 염장을 지르는 것과 같았다. 상처 난 곳에 자꾸만 소금을 뿌려대니 얼마나 쓰라리겠는가.

겨울의 문턱에 서 있는 농촌 앞에 지금 더 큰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한미 FTA’의 국회 비준 문제다. 여야 정치인들이 첨예한 대립을 했지만 결국은 통과되고야 말았다. ‘한미 FTA’ 의 국회비준 통과. 이것은 농업·농촌이 이겨내야 할 또 하나의 겨울이다. 이 거대한 겨울 또한 여태껏 경험한 적 없는 매서운 추위를 동반할 것으로 본다. 아파도 겪어 내야 할 몫이며 무서워도 피해 갈 수 없을 듯하다.

그렇다면 정면으로 부딪쳐보는 수밖에. 그래, 얼마나 매서운지 어디 한 번 와 봐라. 매운맛으로야 누가 우리 민족을 당할 소냐. 얼마나 아픈지 어디 한 번 때려 보거라. 맞을수록 잘 돌아가는 팽이도 있지 않더냐. 

맷집 좋기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농촌이라는 또 하나의 나무. 우리는 이번 겨울의 혹한도 잘 넘길 수 있을 것이다. FTA의 불안까지 더해 한층 더 기세등등할 겨울. 그 겨울 앞에서 맨몸으로 당당하게 찬 바람을 맞는 포도나무들의 표정이 비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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