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 땅을 동양의 덴마크 같은 부국으로 건설하고자 했던 우리나라 농촌운동의 큰 스승, 고 성천 류달영 선생. 5월 6일은 성천 선생이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성천은 한국농어민신문과도 인연이 깊다. 그는 농민들이 유통을 알아야 농산물의 제값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지난 1980년 ‘농산물유통연구소’를 만들어 한국농어민신문의 모태인 ‘농산물유통정보’지를 창간했다. 이어 90년 농민후계자와 함께 ‘한국농어민신문’으로 확대 재창간한 뒤에도 신문사의 명예회장으로서 2001년까지 20여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신문에 ‘성천칼럼’을 연재했다.

90세 고령이던 선생이 ‘소재가 마땅치 않아’ 2001년말 까지만 쓰고 성천칼럼을 마무리하겠다고 했을 때, 인터뷰를 위해 여의도에 있는 성천문화재단 사무실로 찾아가 뵌 적이 있다. “농민들의 발언을 위한 무기가 필요했지. 그래서 농민후계자와 연구원이 함께 한국농어민신문을 재창간한거야.” 당시 선생은 예의 그 어린아이 같은 미소와 카랑하고 또박또박한 기개가 청년 그대로였다. 선생은 고령임에도 재단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2004년 10월27일 향년 93세를 일기로 귀천했다. 

성천은 농민을 사랑하고 대변한 농촌운동의 대부이자, 사람을 사랑하는 휴머니스트로서의 길을 걸었다. “인간답게 살자는 거야. 사람이 사람 노릇 하자는 거지. 독립도 사람이 해야 하고, 농민이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는 중학교 때부터 러시아의 ‘브나로드 운동’을 우리 농촌에서 실천하려다 양정고보를 들어가 5년간 담임을 한 김교신 선생을 만나 인생의 전기를 맞았다. 수원농림(서울농대) 시절 김교신 선생에게서 받은 20쪽 분량의 덴마크 책자를 받아 읽은 그는 ‘한국의 독립은 덴마크적 정신으로 온 국민이 협동해 어려움을 극복하고 실력을 길러가는 길’이라고 확신했고 그것은 평생 화두로 이어졌다.

심훈의 상록수 주인공인 ‘최영신’은 사실 성천이 1939년 전기를 쓴 ‘최용신’이 모델이다. 최용신이 안산 상록수 전철역이 있는 ‘샘골’에서 강습소를 할 때 성천이 모금을 통해 그녀를 도왔고, 그녀가 죽은 뒤 ‘최용신의 생애’라는 전기(성서조선사 발간)를 쓴 것이다. 최용신 전기는 베스트셀러였지만, 일본경찰에 의해 압수를 당했다. 그것을 빌미로 성천은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등과 성서조선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심훈은 동아일보 현상소설 당선으로 많은 상금과 고료를 받았지만. 

“내 일생은 덴마크 연구와 농민운동의 한 길이었어. 이 나라를 동양의 덴마크로 건설해 보려는 꿈을 안고 이념의 씨를 국민들 가슴속에 뿌렸지.” 그는 현대사의 격동기에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귀천하는 날까지 그 꿈을 안고 살았다. “짝사랑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 진솔한 사랑이야. 이 나라 젊은이들이 순수한 짝사랑으로 나라 발전과 인류평화에 이바지하길 바랄 뿐이야.”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지만, 석가와 공자, 소크라테스에게서도 배웠고, 그 누구에게도 관대했던 그다. 성천은 그 때 작은 불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불상은 항시 웃잖아. 불상을 보고 착한 것을 느껴야 그게 불상인 게야.” 과연 나는 성천 선생처럼 모든 일에 민족을 생각하고, 동족과 더불어 기쁨을 나눌 수 있을까. 선생의 미소가 떠오를수록 생각이 깊어지는 5월이다.
이상길leesg@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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